그레이스 팜*****

“건축과 자연과 커뮤니티가 어우러진,
현대 건축의 끝판 왕”

Grace Farms
SANAA
2015
New Canaan, CT, USA

2017

우리가 처음 그레이스 팜에 갔던 건, 건축이 완료된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2017년 겨울이었다. 수아가 1살을 갓 넘겼고, 나도 MBA 졸업 후 부띠끄 컨설팅 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을 시작했던 때였다. 일이 조금 익숙해질 무렵쯤에 그레이스 팜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그레이스 팜은 코네티컷 주에 위치해 있다. 맨하탄에서는 어림잡아 5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데,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80킬로 정도 된다. 교통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편도 약 1시간 30분에서 2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다.

뉴저지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조지 워싱턴 다리(조다리)를 건너서 뉴욕을 거쳐 코네티컷으로 올라가는데 어찌됐건 2개 주를 횡단하는, 나름의 여행이다. 아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점심을 먹고 출발을 했는데 — 가서 점심을 해결안해도 되는 장점이 있다 — 그래서 대부분 사진이 오후 4-5시 경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가 처음 찍은 사진이 2017년인데 당시만 해도 결혼식때 받았던 소니 NEX-5T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아직 사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기 전이었는데 크롭 바디 카메라가 가지고 있는 느낌이 있다.

수아가 갓 1살을 넘겼던 때 😍 낮잠을 자고 있는 수아에게 옷을 입히고 그레이스 팜으로 출발!
당시만 하더라도 아주 튼실한(!) 다리를 가졌던 수아. 이 날 그레이스 팜의 티 하우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날 처음 가족 사진을 찍었는데, 훗날 늘 이 장소에서 가족 사진을 찍는 우리만의 작은 전통이 생긴다 👪

2018

2017년 겨울에 첫 방문을 하고, 다음 해인 2018년에도 그레이스 팜에 갔다. 의도했던건 아닌데 같은 달인 11월에 그레이스 팜을 다시 방문하는데 이때 우리 가족에게 깜짝 놀랄 선물이 찾아온다.

바로 둘째 노아의 임신 소식. 또한 본격적으로 미러리스 카메라에 입문을 하는데, 렌즈가 28-75 단 하나였음에도 모던한 공간의 느낌을 잘 담아낼 수 있었다. 갓 2살이 넘은 수아와 함께 노아의 초음파 사진으로 임신 기념 사진을 찍었다.

바로 이 사진이 그레이스 팜의 연차 보고서에 실리게 된다 🤩
노아 임신 사실을 알게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찾아간 그레이스 팜. 이때만 하더라도 노아가 아들인지 딸인지 몰랐는데. 노아의 태명은 ‘소금’이었다 🥰

그리고 신기한 일이 있었는데 이 날 찍었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그레이스 팜의 크레에이티브 디렉터 분에게 연락이 와서 그레이스 팜 연차 보고서에 우리 사진을 써도 되냐고 했고, 우리는 당연히 된다고 했다.

그레이스 팜은 비영리 재단에 의해서 운영이 되고 있는데 매해 연차 보고서를 발행한다. 그렇게 해서 재인이와 수아의 사진이 2018년 그레이스 팜 연차 보고서 (12 페이지)에 박제 되어 버렸고, 우리는 그 연차 보고서를 소중한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다.

2019

이듬해 6월에 찾아간 그레이스 팜은 눈부신 하늘과 화창한 녹음으로 겨울보다 더 생기가 돌았다. 무엇보다 겨울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캐노피(덮개)의 나무가 눈에 띄었다.

강을 형상화한 그레이스 팜의 건물은 총 5개의 공간이 있는데, 방문객이 주차를 하고 모던하게 지어진 헛간(Barn) — 헛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예쁘다 — 을 지나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 바로 티 하우스이다.

이 티 하우스 덕분에 그레이스 팜에 갈 때마다 나는 ‘환대’를 받는 느낌을 받는다. 티 하우스의 마스터라고 할 수 있는, 머리가 하얗게 센 멋진 중년의 남성분께서 매우 낭랑한 목소리로 티를 따라 주시는데, 글로는 차마 담아낼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내게 그레이스 팜은 이 티 하우스가 주는 느낌이 약 70% 이상일 정도로 티 하우스의 마스터 분이 주시는 인자하신 인상이 그레이스 팜 전체의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수아가 많이 컸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돌아보면 너무 아가아가한 수아의 모습이다 👶
수아와는 달리 노아는 입덧이 꽤 심했다. 노아가 태어나기 1달 전.
티 하우스에서 무료로 주신 차를 마시면서. 아이에게는 카페인이 들어가지 않은 차를 직접 만들어 주신다 🍵

2023

위에 2019년 그레이스 팜을 방문 한지 1달 후에 노아가 태어났고, 그 해 겨울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우리는 4년 동안 그레이스 팜을 다시 찾지 못하게 되었다. 공공 장소 방문이 어려워진 탓도 있었고, 노아가 태어난 이후 두 아이를 키우는 중에 2021년에는 커머셜 부동산 분야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고, 2022년에는 새 집으로 이사 오는 등 여러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찾게된 그레이스 팜은 여전히 기품있었고 변함 없이 우리 가족을 맞아 주었다. 뱃속에 있었던 노아는 3살이 넘었고 아가아가했던 수아도 어느덧 6살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을 이토록 잘 설명해 주는 사진이 있을까. 바로 위 2019년도에 찍힌 수아의 모습 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 노아의 모습이다. 노아의 첫 방문 👦
5년 만에 찍게된 가족 사진. 어느덧 미국에 온지도 10년차, 만으로는 9년이 되었다. 재인이와 둘이서 시작한 가정이 어느덧 넷이 되었다 👨👩👧👦

2024

이듬해 겨울 찾은 그레이스 팜. 2024년 1월은 기록적인 눈 폭탄이 내린 달이었다. 겨울 중 찾아갔던 그레이스 팜 중에서 가장 눈이 많이 쌓여있었다.

특히 이 날은 건물 외부와 건물을 둘러싼 조경이 더 눈에 들어왔던 시간이었다. 뉴욕의 브라이언트 파크,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플라자를 디자인한 OLIN 이라는 조경 회사의 작품인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통유리로 되어 있는 건물 안에서 흰눈이 내린 바깥 풍경을 보면서 아름다운 코네티컷의 자연을 감상을 하는 것은 물론, 짧게나마 눈밭에서 아이들과 놀았던 추억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재인이의 카톡 프로필로도 쓰인 사진. 여러 사진 중에서 카톡 프로필에 ‘선정’된다는건 큰 영광이다 👑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무도 바깥에 나오지 않았고,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하얗게 뒤덮인 그레이스 팜을 더 누릴 수 있었다. 눈이 오니 더 미니멀해진 이곳 ❄️️
이제는 가족 사진을 찍을 때 마다 한없이 장난을 치는 두 아이들과 함께 🤣

A/A — About Architecture

“건축에 대해서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지닌 이들이 만든 영리한 건축”

그레이스 팜을 방문하고 느낀 점은, 건축에 대해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지닌 이들이 만든 영리한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이 지역은 동북부의 리버럴한 사람들의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정치적인 부분을 차치 하고서라도 그레이스 팜이 다른 여타 공간과는 다른 곳임은 분명하다.

주변에 녹아드는 디자인

무엇보다 건물 디자인이 훌륭하다. SANAA는 주변 환경에 녹아드는 건물을 만들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네모난 빌딩이 아니어서, 통상적인 입구조차 없다. 지붕(캐노피)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도 얇고, 무엇보다 유리의 곡선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매끈하다. 어떻게 이 퀄리티로 만들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보통 훌륭한 건축이라고 한다면 외관이나 디자인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레이스 팜은 내부 프로그램도 훌륭하다.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

지역 주민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으로, 모든 것이 무료이며 가족 친화적인 공간이기에 유모차를 끌고 가기에도 무리가 없고, 아이들에게 눈치를 주는 이도 없으며, 직원들 모두가 친절하다. 농구장에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운동을 하고 있고, 도서관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와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다. 심지어 건물을 만들기 위해 베었던 나무들은 카페테리아의 큰 원목 테이블로 다시 태어났다.

교회 건물은 일요일에 기독교식 예배를 드리는 것 외에는 평소에 ‘정의(Justice)’를 주제로 다양한 세미나를 여는 데 사용되며, 수준 높은 아티스트의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내부 인테리어도 훌륭하다. 각 공간의 쓰임새에 맞게 인테리어가 튀지 않게끔 잘 꾸며져 있다.

사람과 자연이 중심이 되는 건축

무엇보다 그레이스 팜의 가장 큰 장점은 건물이 드러나는 공간이 아니라, 건물을 둘러싼 코네티컷의 ‘자연’이 드러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더 많이 개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었다. 그레이스 재단의 소유주도 남부럽지 않은 금융 재벌임에도 불구하고 초호화 맨션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장소에 공공을 위한 멋진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류의 공간을 떠올리자면 스위스 바일 암 라인에 위치한 비트라 캠퍼스 정도일까? 차이가 있다면, 비트라 캠퍼스에서는 각 건축가의 작품들이 ‘날 봐주세요!’라고 외친다는 기분이 든다면 그레이스 팜에서는 건축이 아무말도 없이 조용하게 자연에 파묻혀 있다는 느낌이다.

앞으로도 찾아갈 그레이스 팜

그레이스 팜은 이따금씩 생각이 나는 공간이다. 우리 가족만의 자그마한 전통이 쌓여있는 곳이기도 하고, 갈 때마다 새로운 프로그램이 있어서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더 커진다면 10분 거리에 있는 필립 존슨의 글라스 하우스와 더불어 1시간 거리에 있는 예일 대학교 — 루이스 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 에서도 시간을 더 쌓아가고 싶다.